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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 극복 수기

[난임 극복 수기]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았더니 찾아온 보통의 일상이라는 큰 선물

『본 수기는 분당제일여성병원 제6회 난임캠페인 난임 극복 수기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분의 수기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분은 블라인드 처리가 되었습니다.

 

 

*위 이미지 내용의 이해 돕기 위해 삽입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2021년 저의 아쉬운 45살을 마무리하는 연말입니다.

옆에서는 금쪽같은 아들과 딸, 신랑이 알콩달콩 놀이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네요.

 

2009, 연애 한번 못해보던 8번째 막내딸인 순진한 아가씨는

첫 연애와 불같은 첫사랑을 하고, 6개월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빠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꿀 같은 신혼도 너무 좋았고 둘만의 행복도 넘쳤지만,

이미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주위 시선엔 출산에 대한 염려를 자주 듣게 되고,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난임 클리닉을 다녔습니다.

 

곰처럼 무던했고 쿨하다 자부했던 저의 성격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조급해지고,

자연임신을 유도했던 난임 클리닉에 처방에도 감감히 소식이 없고,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던 생리가 너무 원망스러워

홀로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배란 주사를 맞게 되었고,

배에 주사를 맞는 것도 그렇게 무섭고,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해서 남들 다하는 임신도 안 되냐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를 여러 번, 회사 냉장고에 배란 주사를 보관하고,

화장실에서 몰래 주사를 놨던 시간들.

 

친정아버지 장례식 화장실에서도 배란 주사를 홀로 맞았던 기억들.

그렇게 배란일이 되어, 한 달에 한 번 숙제를 해야 하는 날엔,

신랑도 그런 의무감에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회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여자가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았었던 것인지!

그렇게 당부하고 당부했는데, 술을 먹고 늦은 시간 귀가를 한 모습을 보고,

저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었지요.

 

속도 모르고 술만 마시면 잠을 자버리는 술 버릇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고,

전 불 꺼진 방안 화장대에서 훌쩍 훌쩍 울다 울다, 이렇게 한 달을 또 보내고

생리를 맞이하는 때가 너무너무 두려웠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지

감정이 북받쳐, 코를 골고 자고 있던 신랑을 있는 힘껏 때리며 울부짖었습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해”,“넌 뭐가 힘들어서 이러는데” 하며,

마치 짐승이 미친 듯 울부짖듯 그렇게 악을 쓰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결국 신랑도 울고 저도 울고, 그렇게 우리는 숙제를 했습니다.

 

원망스럽게도 생리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단계까지 다다르고,

홀로 난임 클리닉 시술대에 누워,

인위적인 삽입 시술을 하는데, 아팠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더 아팠습니다.

 

저와 함께 시술대에 누워있던 분들도 계셨는데,

전 꺼익 꺼익 숨이 넘어가도록 한참을 울었습니다.

간호사는 많이 아팠냐며, 괜찮냐고 물었지만,

“제 마음이 너무 너무 아팠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연임신,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10번째쯤 되었을까요?

기적적으로 임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쌍둥이 임신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에 눈물밖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기뻤습니다.

 

하루하루가 꽃길 같다는 말이 이런 거였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임신 4개월 전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자연도태가 되어

배속 아기가 한 명밖에 없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쉽지만, 한 명에 아기라도 있으니 괜찮다며 위로하고 5개월이 되었을 무렵,

전치태반으로 시시때때로 하혈을 반복하고

엠뷸런스에 입원도 반복하기를 마음 졸이며 지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또 하혈을 했지만, 괜찮을 거야!

하고 엠뷸런스를 불렀지만 그날은 몹시 배가 아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배가 아팠고, 이런 통증은 처음이었습니다.

 

대학병원으로 실려가고 이렇게 아픈데 왜 아무 조치도 해주지 않는지,

! 소리가 날 만큼, 항의도 못할 만큼..

입에서 “오빠! 나 좀 살려줘”라고 반복하며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급기야 응급 수술방으로 이동하고 그렇게 자연유산이 되었습니다.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집에 혼자 있을 때,

못 먹는 소주를 2병 사서, 유리컵에 벌컥벌컥 들이붓고 마셨습니다.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 지탱하기 어려웠고, 직장을 구해서 일에 빠져살았지만,

일하다가도 대성통곡하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습니다.

 

집에서 신랑을 앞에 두고, 나랑 이혼하고 새 장가 가서

아기 낳고 살라고, 헤어지자고도 했고, 그럴 때마다 신랑은 아기 없어도 되니까

너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는 포기하자고!  친언니가 위로해 주기 위해 쇼핑을 가자고 했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쇼핑하다,

우연히 아기 유아복 매장을 지나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목놓아 울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이상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유산을 했던 대학병원에서는, 사망한 아기에 대한 서류증빙을 요청한다며

등본을 지니고 해당 대학병원 화장장이 있는

사무실로 서류 제출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서류를 지니고 접수원께 서류를 내밀며,

“아기를 잘 보내달라고”말하고는 그렇게 길가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걸 체념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역시나 망각의 동물인건지.

 

저는 혼자 동네 가까이에 있는 오래된 산부인과 원장님을 찾아뵙고,

그동안에 일을 설명한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고,

자연임신 날짜를 잡은 후 신랑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숙제를 했습니다.

 

모든 게 체념해서인지 그렇게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임신 테스기를 화장실 안쪽 깊숙이 숨겨놓고 혼자 체크를 했고,

드디어 자연임신이 되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신랑에 등을 감싸 안으며,

“여보 됐어! 됐어!” 그 소리만 여러 번 반복하고,

미동 없이 신랑은 말없이, 그저 저를 쳐다만 볼 뿐이었습니다.

이번엔 태아보험도 들고, 여전히 전치태반으로

하혈을 하며 조마조마하게 보냈지만,

지난번과는 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분.

4개월쯤 되었을까요~

기형아 검사에서 다운증후군 상위1%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 심장에서 이상 증후군이 발견됐다는 소리를 들었고,

청천벽력 같은 선천성 기형 심장병이라는 진단을 들었습니다.

임신 8개월 전치태반으로 인한 하혈이 멈추지 않고,

1시간30분을 달려 아산병원으로 응급 입원을 하고

고위험 산모가 입원하는 병실에서 2주를 버티다 제왕수술을 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생후 7일 만에 가슴을 열고 심장수술을 하게 됐으며,

1년 후 또 가슴을 열어 수술을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던 임신기간, 출산, 출산 후 몇 달을

심장수술을 한 아기를 아침저녁으로 면회를 다녀야 했고,

모유를 냉동실에 모아 두어야 했던, 지독했던 출산기를 보내고 난 뒤,

가정에서 50, 백일을 보내며 남들과 같은 평범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1년이 지나고, 둘째를 조심스럽게 말했을 때,

신랑은 절대 안 된다고 손절을 했지만,

저는 고집스레 강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를 임신했고 너무나 예쁜 딸을 출산했으며,

전치태반도 없고 선천성심장병도 없는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지금은 남매가 서로 수다도 떨고 장난을 하며,

여느 개구쟁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신랑 회사에서는 난임 고민이 있는 동료들이 조용히 다가와,

“이럴 때 어떻게 하냐?” 물어보고, 난임으로 힘들어할 때는,

“우리 앞에서는 힘들다는 소리 하면 안 된다”며,

마치 난임 탈출 노하우를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신랑을 보며 피식 웃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곧 지나가리니” 정말 죽을 것 같던 그 순간들이 지나고,

기적이 찾아왔던 순간들이 어느새, 두 아이를 양육하느라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신랑과 술 한잔 기울일 때마다 그땐 그랬지! 하며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며,

전우애 같은 추억담을 함께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희 가정을 보고 희망을 가지세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놓지 않고,

지금은 두 남매와 노는 모습을 보면 흐뭇해할 보통의 일상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