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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 극복 수기

[난임 극복 수기] 세 번의 유산 끝에 만난 나의 아기

『본 수기는 분당제일여성병원 제3회 난임캠페인 난임 극복 수기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분의 수기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분은 블라인드 처리가 되었습니다.

 

*위 이미지 내용의 이해 돕기 위해 삽입되었습니다.



난임 전문병원에서, 과감한 시술과 선제적 대응으로, 내 목숨과 같은 네 번째 아기를 만났다.

 

대학병원 산부인과 10년 이상 경력을 쌓은 간호사 나의 지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난임 전문병원에서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가졌다.

 

서른셋에 결혼한 후 1년에 한 번씩,

3번 습관성 유산을 겪으며 가슴앓이 하는 내게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꼭, 꼭 난임 전문병원으로 가. 거기서 시작해야 돼.”

 

그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건강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 같았고,

조심스럽게 가입한 온라인 난임카페에서 본

어마어마한 대기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첫 번째 임신은 쉬웠다(?). 배란일을 맞췄고, 계획한 그 달에 바로 임신을 했다.

태동이 있을 때도 아니어서 실감이 잘 나진 않았지만

꾸복이라는 태명도 지어주고, 울컥 올라오는 메슥거림에 힘겨웠지만 즐거웠다.

 

8주째 맞던 주말, 신랑이 급한 일로 부산에 내려간 사이 갈색 핏방울이 비쳤다.

놀란 마음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계가 들어간 뒤에도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

 

의사선생님의 당황한 말투에 이어,

생면부지의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 손을 꽉 쥐어주셨다.

그렇게 유산을 통보받았다.

 

염색체 이상일 확률이 제일 크다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병원 대기실에 있는 침대에서 한 시간쯤 울었던 것 같다.

한 주 뒤에 수술을 했다.  바로 다음 임신을 준비했지만, 한겨울에 자연임신은 힘들었다.

 

배란테스트기와 임신 테스트기를 쟁여놓고 주마다 테스트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두 번째 임신은 어느 날 갑자기, 회사 근처 병원에서 소변검사로 확인했다.

아기집도 보지 못한 시기였지만 너무 기쁘고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며칠 뒤 배가 아팠다. 출근 전이라 집 근처 다른 병원에 갔다.

자궁 내벽이 두텁지 않고, 양쪽 난소에 커다란 혹이 보인다고 했다.

화학적 유산이었다.

 

난소 혹은 1주일 사이에 각각 2cm 가량 커졌다.

자궁 외 임신이라도 됐을까 봐 초음파 검사를 아주 오래오래 했던 기억이 난다.

약물 치료를 하고, 임신 준비를 3개월쯤 쉬라는 권고를 받았다.

병원만 네 군데를 다니면서 마음이 피폐해졌지만, 그래도 임신 준비를 멈출 수가 없었다.

 

배란테스트기, 병원에서 배란일 받기 등 약 1년간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날 염증이 있어 회사 근처 작은 개인병원에 갔다.

염증 치료를 하며 난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의사선생님은 분당제일여성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그리고 그 달에 선생님을 만나

초음파 진료와 난포 터뜨리는 주사를 맞고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세 번째 임신했을 때는 태명조차 짓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거실에 놓아뒀던 스파티필룸의 꽃 두 송이 중 나중에 핀 꽃이,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동서의 둘째 임신, 내 임신 소식과 함께 피었던 꽃 두 송이였다.

그런데 내 꽃이, 죽어갔다.

 

2, 그다음엔 5, 성장이 지체되던 나의 세 번째 배아는

예상했던 대로 10주를 채우지 못하고 심장이 멈췄다.

계류유산을 진단받던 날, 나는 시들어가던 꽃을 잘라냈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첫 유산보다 세 번째 유산했을 때 더 힘겨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첫 번째 유산했을 때만큼 울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권유로 태아 염색체 검사와 면역체계 검사를 앞뒀기 때문이었다.

검사 후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래도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술 후 눈을 떴을 때 첫 번째 유산했던 잠실의 모 병원과 달리

침대 매트가 따뜻했다는 것이다.

 

초여름이었는데도 전기매트를 깔아주셔서 따뜻한 자리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태아 염색체 검사 결과 이상 없음,

면역체계 검사 결과 NK cell 19.2, 항인지질항체나 엽산 대사 이상 없음.

결국 NK cell이 문제였다.

수치에 따라 인트라리피드나 면역글로불린 처방이 나올 예정이었다.

 

멀쩡한 아이를 내 몸 때문에 보냈구나 생각하니 자책하게 되면서 마음이 아팠다.

한동안 이 사실 때문에도 많이 울었다.

 

사실 난임시술만은 피하고 싶었다.

배에 직접 놓는 주사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고,

자연임신을 계속했기 때문에 남편도 반대했다.

하지만 검사 이후 약을 이용한 과배란만으로 임신이 되지 않았다.

매달 기대하고, 매달 실망했다. 남편도 지쳐갔다.

 

난임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조급함이 독이다.

알면서도 마음을 편히 먹기가 어렵다.

1년은 365일이지만 임신할 수 있는 확률은 12번뿐이라고들 한다.

배란기 며칠은숙제를 이어가야 하고 월경이 다가오면

한껏 기대했다가냉정한 한 줄에 실망하며 눈물을 쏟는다.

혹시나 싶어 hcg 10 이하에도 반응한다는 민감한 임신 테스트기를

브랜드별로 사서 쌓아놓고 매일 아침 기대와 실망을 반복한다.

 

나이는 먹어가고, 주변에서는 임신과 출산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매번 고통스럽다. 조카도, 지인의 아이도, 마음 편히 사랑스럽게 볼 수 없다.

선생님께서 의구심을 갖는 남편까지 설득해 주신 끝에, 다음 해부터 시술에 들어가기로 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자궁 내부에 자글자글한 것이 보인다는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자궁경 수술을 했다.

깨끗하게 정리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내 손을 잡아주시며, 선생님께서 안심시켜 주셨다.

자궁경 이후 시술하면 임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수술 후 사진을 보니, 폴립이 많았다. 2월에 첫 인공수정 시술을 했다.

 

첫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은 성공할 확률이 로또와 맞먹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도 기대했고, 그래서 실패했을 때 많이 속상했다.

엄청나게 예민해져서 남편과 수시로 싸웠다.

 

인공수정 2차 시도하기 전, 항상 진료를 보던 선생님의 진료가 없는 날

우연히 백은찬 원장님 진료를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역글로불린을 활용한 습관성 유산 치료를 연구하시고

임상과 실제 활용까지 하신 분이라는 것은, 난임카페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원장님께서는 40분간의 상담을 해 주시면서 꼭 임신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셨다.

기존에 진료를 받고 있던 선생님께 죄송하고, 남자 선생님이어서 낯설었지만

1차 때와는 뭐든 다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은찬 원장님께 진료와 시술을 받기로 했다.

1차 때보다 주사 대수도 많았고, 그만큼 키우는 난포도 많았다.

길항제까지 쓰면서 난포 6개를 키웠다.

 

배란유도제를 쓰면 배란이 빨라지는 특성이 있어 미리 말씀드리고 진료 날짜를 앞당겼다.

백은찬 원장님께서는 임신이 확인되면 최대한 빨리 면역글로불린 치료를 시작하자고 하셨다.

물론 저렴한 처방은 아니지만, 또 한 번 아이를 잃는 것보단

선제적 치료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술 10일째 되던 날, 임신 테스트기에 희미한 두 줄을 보는 순간

바로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받았다.

이틀 간격으로 hcg 수치가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면역글로불린 처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처치가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 활동과 난임 카페 활동을 하며 많은 분들의 문의를 받는데,

관성유산을 앓으며 면역글로불린 처치를 받아도 선제적 대응이 안 되면 유산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백은찬 원장님의 임신 4주 차 면역글로불린 처방에 대해

문의하는 댓글을 많이 받았고 응답했던 기억이 난다.

 

임신 5 6일째 되던 날, 피가 비쳤다.

앞선 세 번의 유산도 이즈음부터 성장이 더뎌지거나 멈췄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잘못되면, 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급히 병원을 찾았다. 경력이 많은 의사선생님은 역시 눈썰미가 남다르신 것 같다.

기계를 넣자마자 건강하구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윽고 처음 들어보는 100bpm 이상 건강한 심장소리.

쿵쿵쿵쿵쿵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화장지를 챙겨주셨다.

 

이제 염색체 이상이 아니면 잘못되지 않을 거예요.”

짧지만 단호한 백은찬 원장님의 한 마디는,

250일간의 남은 임신 기간 동안 내게 믿고 버틸 수 있는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유산이라는 단어만 봐도 간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고

그래서 불안함을 다 떨칠 수는 없었지만,

원장님께서 괜찮을 거라고 하셨으니 괜찮을 수 있다고 나 자신을 다잡았다.

 

임신 12, 마지막 면역글로불린 주사를 맞고 산과의 새로운 선생님으로 배정받았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비용도, 심한 입덧도(병원에서도 한 번 쓰러져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구해주셨다),

무엇보다 떨칠 수 없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면 그저 행복했다.

 

출산이 좀 빠르게 이뤄져서, 아기가 양수를 삼켰다.

다행히도 당직 소아과 의사선생님께서 신속히 이송 결정을 해 주셔서

대학병원으로 이송해 열흘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이송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만병원을 옮기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출산 후에는 육아에 바빠서 난임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희미해졌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크게, 오래 울고,

세상에서 엄마 젖을 제일 좋아하는 딸이 내 곁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지금도 조금 더 일찍 난임 전문병원을 찾을걸,

첫 유산했을 때 바로 난임 검사를 받을 걸 하고 후회한다.

 

그랬다면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이 아이를 조금 더 일찍 만났을 것이다.

첫 심장소리를 듣고 엉엉 울고 있는 나와 신랑에게

둘째는 검사 다 하고, 나한테 진료 보고 가집시다.” 하셨던

백은찬 원장님의 말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딸이 젖을 뗄 생각이 통 없기 때문에 둘째 계획은 미루고 있지만,

그때는 또 헤매지 않고 분당제일여성병원으로 바로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