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난임 극복 수기

[난임 극복 수기] 지금까지의 상황은 행복을 얻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며..

『본 수기는 분당제일여성병원 제8회 난임캠페인 난임 극복 수기 공모전에 참여해 주신 분의 수기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분은 블라인드 처리가 되었습니다.』

 

 

*위 이미지 내용의 이해 돕기 위해 삽입되었습니다.

 

따듯한 봄, 창밖에서 불어오는 싱그런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내 자동차는 10년 넘은 회색 꼬마 경차다.

자동차의 작은 바퀴가 아스팔트 위에서 동동 구르는가 싶더니 시내 어딘가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온 건데, 시내만 들어서면 거기가 거기 같네. 대체 여기가 어디지...'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빙빙 맴돌다가 드디어 간판이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서른 중반이 넘도록 산부인과는 난생처음이었다.

 

6층에 올라가니 데스크가 먼저 보였다.

오후라 그런지 대기 없이 바로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흔 중반쯤 돼 보이는 단정한 외모에 까만 테 안경을 낀 남자 의사가 앉아 있었다.

의사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되어 묻는 말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지막 생리일이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렸으니 말이다.

 

​의자 같지만 엉덩이만 갖다 대면 자동으로 눕는 의자에 앉았다.

방금 전 진료를 봤던 선생님이 또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초음파를 볼 때 큰 이상은 보이지 않지만

결혼 3년 동안 피임을 하지 않고도 임신이 안 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 편으로는 원인을 찾아야 할까 싶었다.

하늘은 우리 부부에게 아기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하는데 억지로 가져야 할 이유를 몰랐다.

 

​당시 서른 중반이었던 나는 아기를 간절하게 원하지 않았다. 남편 역시 내 생각과 같았다.

우리 부부는 때가 되면 언제든 임신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더라도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할 거라 생각했다.

 

​검사를 끝내고 일어나려 하니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휘청이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선생님은 내가 받아야 할 검사와 남편에게 필요한 검사를 친절한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일반 병원에서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따듯함이었다.

 

​회사를 두 시간 일찍 끝내고 위치를 찾지 못해서 헤맨 시간에 비해 검사시간은 짧았다.

다음번 진료 예약을 했지만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민망한 의자에 앉는 것도 싫었고, 검사 이유도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이라고 생각했던 두 번째 검사에서 임신이 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이에 비해 난소가 약했고, 남편은 정자 수가 부족함과 동시에 활동력까지 약했다.

선생님은 이제 시작이니 과배란 약을 먹고 자연임신 시도를 해보자고 했다.

 

과배란 약을 규칙적으로 복용하고 방문한 검사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약을 먹어도 난포 개수는 두세 개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채취를 하기 전까지는 공난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자연임신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매번 임신에 실패했다.

이후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인공수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 정도 불편함이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 게 한 건 약을 먹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 병원을 찾아가는 과정들이 아니었다.

이식 후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희망과 좌절이 엇갈리는 시간이었다.

희망은 잠시요, 임신이 되지 않은 걸 확인 한 날에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헤매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방황자가 된 기분이었다.

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오긴 하는 걸까. 이러다가 터널 속에서 영영 갇히게 되는 건 아닐까.

 

마지막 인공수정 이식을 한 후 12일이 되기도 전에 임신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침침한 눈을 비빈 후 화장실로 향했다.

종이컵에 첫 소변을 넣고 임신 테스트기 끝부분을 적셨다.

어느새 소변은 줄을 타고 쭈욱 올라갔다. 소변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빨간색 한 줄이 보였다.

이제 희미하게라도 한 줄만 더 생기면 된다. 그러나 희망은 바람에 머물 뿐이었다.

줄뿐인 테스트기를 아무리 빛에 비쳐봐도 도저히 두 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하느님께 바람을 외쳤다.

씻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동안 혹시 두 줄로 변한 게 아닌가 싶어

테스트기를 형광등에 갖다 대고 눈이 빠져라 살펴보았다.

이렇게 인공수정 마지막 차수는 실망을 남긴 채 끝났다.

 

임신이 되지 않은 걸 알면서도 예약해놓은 날짜에 맞춰 병원에 갔다.

이식 후 병원에 가면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피검사를 한다.

피검사는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에 빠졌다는 걸 증명하는 검사 같았다.

0%의 기대감이 주는 아픔은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부여잡는다.

임신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 출근길로 향하는 발걸음은 다른 날보다 터벅터벅 무거웠다.

사실 이런 기분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회사 동료들은 임신 결과를 궁금해했다.

 

"역시 이번에도 실패야."

 

내 말을 듣고 있던 동료 중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 번 시도해서 안되면 포기해야 한다,

더 이상 몸이 망가지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지 않냐고 말했다.

물론 타인을 생각해서 한 조언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마음속은 더욱 무거웠다.

차라리 되던 안되던 될 때까지 해보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다음 차수에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난임은 누군가를 통해 이해와 용기를 바랄 게 아니라 자신과의 긴긴 싸움과도 같은 일이다.

쓰러지고 주저하고 일어서는 일도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하얀 눈이 살포시 내리는가 싶더니 온 세상을 겨울 왕국으로 만든 추운 계절이다.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을 때 나는 첫 번째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시험관 시술이 시작부터 난간에 부딪혔다.

간호사는 처음 보는 주사와 약을 보여주며 "보기보다 어렵지 않아요.

주사액 상단에 바늘을 꽂고 약을 넣어주기만 하면 돼요.

뱃살을 살짝 잡지 말고, 아플 때마다   꼬집듯이 잡아봐요.

이때 주삿바늘을 살에 넣어주면 되는 거예요. 어때요? 하나도 아프지 않죠?"

', 간호사 선생님 주사는 아프지 않은데, 내가 직접 놓는 주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걸요.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주사약을 주섬주섬 뜯고 바늘을 병에 꽂았다.

이윽고 뱃살을 꽉 부여잡았지만 도저히 바늘이 살에 꽂히질 않는 거다.

따갑고, 아프다가 찌른 부위에 피가 맺혔다. 살에 피가 맺히는 만큼 참고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실 피가 나서 아픈 것보다 바늘은 애꿎은 마음이란 곳까지 찔러 여러 곳에 상처를 만들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닦지 않으면 눈이 침침해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아까는 살갗에서 빙빙 맴돌던 바늘이 쏘옥 들어갔다. 앗싸! 성공이다.

 

시간이 지나 주사를 맞은 배는 바늘을 찌른 흔적으로 여기저기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기를 갖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참아야 했다.

 

 다음 날 난자 채취를 위해 정해진 시간에 마지막 배 주사를 맞았다.

채취 당일에는 마치 큰 수술을 앞둔 사람처럼 마음이 쿵쾅쿵쾅 요동쳤고 두려웠다.

채취 도중 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서 손발을 묶는다.

팔에 대 바늘을 꽂고 맥박 수치가 띠 띠 띠 귀에 울려 퍼졌다.

곧바로 의사선생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의 비장한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마취약이 들어간다고 했고 나는 곧장 잠이 들었다.

 

곧 난자 두 개를 채취했다. 난자를 많이 채취해도 질을 보장할 수 없으니

두 개라도 건강하다면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선생님.

시술이 끝나고 곧장 집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당부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자동차에 올라탔다.

시술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긴장을 해서인지 뱃속에서는 꼬르륵 배고프다는 소리를 냈다.

마침 병원에서 챙겨 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차가워져서 딱딱해진 베이컨과 고소한 치즈가 어우러진 샌드위치였다.

맛있어서 양이 아쉬운 샌드위치를 뒤로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어느새 작은 눈송이가 하늘에서 춤추는 듯싶더니 자동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늘 위에서 떠다니는 눈송이가 기다리는 예쁜 아기천사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처음으로 보는 두 줄이다. 시험관 1차 시술로 임신이라니!

떨리고 설레는 마음에 친정과 시댁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 다들 너무 잘 됐다.

이제 몸조심하라고 축하해 주었다. 회사 동료들도 기뻐해 주고 축복해 주었다.  

 

초음파에 가장 먼저 찍힌 모습은 아기의 보금자리였다.

이윽고 한 주 한 주 시간이 흐르자 아기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10주만 넘기면 눈사람으로 변한 아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행복해하던 나와 달리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쩌죠. 아기가 지난주보다 더 자라지 않았어요. 게다가 심장이 뛰질 않아요.

계류유산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유산은 들어봤는데 계류유산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혹시 작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날 간호사가 적어준 수첩에는 아기 맥박수가 '0'이었다.

더 이상 아기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었다.

 

"선생님 수술을 토요일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월요일에는 출근해야 하거든요."

 

선생님에게 수술 날짜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이내 조용한 병원 안에서 엉엉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아기가 내 곁을 떠났단다. 내게 희망과도 같던 아기가 곁에 없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 임신이 되고 가장 먼저 축해해 주신 분은 단연 '시아버지'였다.

시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꼴로 몸은 괜찮냐며 안부전화를 하셨고,

좋은 거 잘 챙겨 먹으라며 용돈까지 건네주셨다.

그런 분께 유산이 되었다는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실망하실 시아버지를 떠올리니 더욱 가슴 아팠다.

 

이후 시아버지는 유산이라는 실망감을 안고 환갑을 맞이했다.

가족과 친척이 모여 식사를 했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환갑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시아버지를 보낸 슬픔과 외로움에 남편과 나는 한동안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3차 시험관을 하기 위해 난자를 채취했고 운명인지 또다시 한 아기가 찾아왔다.

너무 간절해서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으면 잡고 있던 손을 놓을까 봐,

기뻐도 덜 기쁜 척, 덜 행복한 척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지인 아이가 돌잔치를 앞둔 어느 날, 나는 축하 선물로 내복을 사기 위해 근처 유아복 가게에 갔다.

곧 있으면 우리 아기 내복도 준비해야 했지만 조금만 미루고 싶었다.

하얀 구름처럼 생긴 작은 내복이 예뻐서 손바닥으로 촉감을 느껴보았다.

아기 엉덩이처럼 보들보들했다. 지인 아기를 위한 연한 핑크빛 내복을 두 벌 샀다.

내복을 사서 쇼핑백을 들고 오는 느낌을 몇 달 후면 내 아이에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설렜다.

 

7 5, 검진차 병원에 들렀다. 지난주보다 더 성장해 있을 아기를 생각하니 행복했다.

하지만 아기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아기가 뱃속에서 잘 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또 그렇게 아기를 하늘로 보내기 위한 수술을 해야 했다.

처음 아기를 보냈을 때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는 게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몸이 먼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토요일 오전 수술을 마친 후 하루 종일 잠만 잤으니,

아픔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차례나 찾아온 이별에 남편 지인은 꼭 가보라며 지방에 있는 한약방을 소개해 줬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지어준 한약을 먹고 곧바로 아기가 찾아왔다며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말도 보탰다.

 

그날 역시 추운 겨울이었다. 한약방이 위치한 곳은 지방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도착한 시간은 어둠이 쏟아지던 깊은 밤이었고 폭설이 한차례 내린 후였다.

차에 내리자마자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으며 우리는 한약방으로 향했다.

한약방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하는 수없이 남편과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한약방에 손님이 많기 때문에 일찍 서두르라는 지인의 말에

이튿날 7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도착한 한약방 주인은 나이가 90살은 돼 보였다.

나는 얼마 전에 유산을 했고 시험관 시술을 앞두고 있다며 지금까지 있던 사연을 털어놓았다.

노인은 손목에 있는 맥을 짚더니 손발이 차서 몸이 따뜻해져야 한다고 했고,

남편은 장이 좋지 않아서 장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노인이 말한 대로 한약을 처방받았다.

한약방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유난스럽게 얼굴을 스쳐 지나는 바람에

가뜩이나 움츠린 몸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약방 근처에 있는 낮은 산에 오르기로 했다.

남편은 운동하는 걸 싫어했지만 이날만큼은 왠지 걷고 싶은 날이었나 보다.

그는 내 옷이 추워 보였는지 외투를 목까지 잠가주었고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우리는 두 손을 잡고 정상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산을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은 청량했고, 입안으로 내쉬는 공기가 시원했다.

정상에 다다르자 작은 정자가 보였고, 이윽고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냥 좋았다.

남편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이후 나는 소문으로 좋다는 복분자, 면 생리대, 생강 즙, 모든 걸 먹고 경험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아기가 찾아올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었다.

의사 선생님은 시험관 시술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몸이 상할 수 있으니

몸이 쉴 수 있도록 자연임신 시도를 하다가 인공수정을 다시 한번 해보자고 권유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시험관 시술을 하고 싶었지만 모든 게 욕심이었다.

기대했던 한약도 몸에 좋다는 모든 음식도 임신을 도와주지는 못했다.

자연임신과 인공수정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역시나 임신 테스트기는 한 줄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혹시 많은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임신이 어려울까 생각했다.

난임 카페에 직장인 난임치료에 관한 글을 올렸고,

회원 대다수가 퇴사를 고민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를 꼭 다녀야 한다는 하나의 댓글이 보였다.

시간이 많다 보면 임신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서 심리적으로 더 힘든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직장을 다니며 난임치료를 하는 게 경험자로써 더 좋을 거라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일을 하면서 치료하는 일이 어쩌면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더 필요한 처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험관 시술 4차를 시작했다. 어느새 난임치료를 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4차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그때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금보다 더 걸린다 해도

아기가 생길 거라는 믿음은 자신을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은 직장에 다니는 환자를 위해 늘 아침 첫 진료를 해주었다.

심지어 계류유산을 했을 때도 평일에 시간을 내는 게 어려운 내게

난임 환자로 붐비는 토요일이어도 수술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선생님은 다른 무엇보다 내가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료하는 과정마다 따뜻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임신이 될 때까지 선생님을 믿고 따라간다면 언제든 기적은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시험관을 할 때마다 난자 채취를 했고, 이윽고 3개의 난자를 채취했다.

다행히 3개 모두 수정이 되어 이식을 앞두고 있었다.

하필 이식 날이 명절을 앞둔 마지막 평일이었다.

그날은 간호사 선생님도 당직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근무를 하지 않는 날이었다.

선생님에게는 그날 세 명의 이식 환자가 있었다. 나는 두 번째 대기 순번이었다.

첫 번째 이식이 끝난 후, 선생님은 부랴부랴 대기실로 뛰어나와 내 이름을 호명했다.

평상시에는 간호사 선생님이 환자 이름을 부르고 의사 선생님은 책상에 앉아 상담만 했는데,

이식 날은 의사 선생님 혼자서 모든 걸 해내고 있었다. 선생님은 흰 가운을 입은 멋진 날쌘돌이 같았다.

 

"수정란 3개를 모두 이식할 거예요. 혹시 2개가 수정되어 쌍둥이가 찾아온다면 두 배로 기쁘겠어요.

잘될 수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 봅시다!"

당시 선생님의 주먹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두 주먹 불끈 쥐고 희망을 외치는 것 같았다.

 

이식이 끝난 며칠 후, 둘째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전에 커다란 포도를 따는 꿈을 꿨어.

그리고 어제는 큰 조개를 줍는 꿈이었는데 이상하더라?

혹시나 해서 너 잘 된 건가 하고 전화해 봤어."

 

실망하는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아서 피검사를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계획은 무산되고, 임신 테스트기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러자 희미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눈에 봐도 선명한 두 줄이 보였다.

이식했던 날짜를 계산해 봐도 시기 대비 이른 두 줄이었다.

꿈일 수도 있으니 볼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아파!  분명 이건 현실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임신 테스트를 했고, 두 줄은 신기하게 계속 진해지고 있었다.

 

피검사를 한 날에는 역시나 놀라운 수치를 보았다. 혹시 쌍둥이가 아닐까 기대하겠다는 선생님.

 

나는 기쁜 나머지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기대하고 있던 진짜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 멈추는 게 어떻겠냐고. 차라리 입양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몸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모두 지치는 일이라고. 아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둘만 행복하면 됐지, 훗날 아이가 어른이 되면 결국 둘만 남는다고.

나를 생각해서 하는 모든 말들이 내게는 멈춤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들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었다.

밥 먹으라고 하면 먹기 싫었고, 그만 놀아라 하면 더 놀고 싶었다.

공부 좀 하라고 하면 하기 싫었고, 노래 좀 그만 들으라고 하면 더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이런 나의 청개구리 같은 습성은 아기를 갖기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난임은 긴 기다림의 싸움이고, 때로는 외롭고, 너무 달려서 숨이 찰 때도 있다.

때로는 펑펑 울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고,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임신이 된 엄마들에 비해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쌍둥이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단 태아 엄마들보다 힘들다는 표현을 자주 하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보고 대학병원 산부인과 선생님은 쌍둥이 엄마 치고 씩씩하다고 말했다.

이미 나는 임신을 하기 전부터 내 앞에 닥친 고통과 시련을 자주 연습해온 사람이 아닌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오뚝기처럼 다시 일어섰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따뜻했던 봄, 회색 강아지를 닮은 작은 자동차를 몰고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너희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의 해맑은 미소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개그맨이자 고명환 작가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낮과 밤이 합쳐져 하루가 된다. 어둠이 밝음이 합쳐져야 온전한 하루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행복과 불행이 합쳐져 있다. 행복과 불행이 공존해야 완벽한 인생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의 불행은 행복을 얻기 위한 과정임을 잊지 않기로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쌍둥이 엄마이다.